광주 5.18 민주화 운동 시작과 끝.
오늘은 어제에 이어 3번 째 광주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리뷰를 씁니다.
보시기 쉽게 최대한 정리를 하였으며 너무 자극적인 사진은 자제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으로 18년, 장기 집권의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재 붕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학생 위주의 20만명 운집.
이때, 서울역 현장의 중심에서 매파로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과 비둘기파라고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을 통탄 할 회군사건이 일어납니다.
○심재철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 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준하자."
○유시민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그 날, 20만 군중은 각 학교로 일터로 돌아가고 이틀 후인 5월 17일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운동 지도부와 주요 민주 인사들이 체포 또는 수배되었다.
5월 17일. 저녁, 10경.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 한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등교를 하던 전남대학생들은 통제를 하던 진압군에게 항의하며 "계엄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항의를 한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내로 향한게 된다.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 계엄군은 무차별 진압을 시작하며 만류하는 노인과 여성에게 곤봉세례를 가한다.
1980년 5월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한다. 그리고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의 진압작전을 전개한다.
이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를 가하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한다.
그리고 첫 번 째 사망자가 발생한다.
1980년 5월 20일. 항쟁 3일 째,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명이 넘어섰다.
오후 9시 40분, 계엄군 당국이 신문방송 등 언론을 장악한 다음, 공수부대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자 여기에 분노한 시민들이 궁동에 소재한 MBC방송국을 태우고, 이어 신안동에 위치한 KBS방송국을, 21일엔 광주 세무서를 불태웠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 중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가 있었다. 이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엽기적인 만행을 저지른다.
전남대 교내에서 는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고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 한다.
1980년 5월 21일 석가탄신일.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한다.
오전 10시 15분, 도청 앞에서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
오전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오후 3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였다.
오후 4시, 인근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
이날 시민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1980년 5월 24일.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후, 그 분풀이로 인근 마을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지원도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이 사망했다.
1980년 5월 26일.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후 죽음의 행진 감행.
24시 정각,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1980년 5월 27일. 충정작전 개시.
오전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 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의 메아리가 도시를 울린다.
오전 4시, 총성과 수류탄 소리를 시작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립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 이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사망,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 발생.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하였다.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으며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 5.18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고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이다.
이후, 호남 지역 전역에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지금의 미래통합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호남권에서 왜 그렇게 미래통합당을 싫어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알게 되었네요.
*민주정의당은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의 뿌리 중 하나로, 1990년 민주자유당으로 개편, 김영삼 정부 시기에 신한국당, 이후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계승.
'세상의 모든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아이에게 필요한 부모의 기다림 (18) | 2020.05.01 |
---|---|
테슬라와 스페이스X 그리고 뉴럴링크 등, 세상을 움직이는 일론 머스크 (18) | 2020.05.01 |
'줌바밍(Zoombombing)' 국내 온라인 수업 비상 (28) | 2020.04.29 |
5.18 민주화 운동 (23) | 2020.04.29 |
법원 앞에 무릎 꿇은 전두환 동상, 분노 폭발한 5. 18 광주 시민들 (38) | 2020.04.28 |
댓글